남의 돈으로 좋은 일 하는 직업, 공무원

지금 저는 공무원입니다. 주로 인사행정, 민원제도, 행정혁신에 관한 일들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정부3.0' 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정부혁신에 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해 제가 느낀 것입니다. 공무원이 되려는 후배들이나, 공직의 특징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던 때에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한 두 시간은 신문을 읽었는데 특히 경제면 기사들이 재미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초에 사회 선생님에게 진로와 진학 문제를 상의하러 갔습니다. 경제부처 이름 몇 개를 들었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공무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겨우 그 정도만 알고서 경제학과를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경제학과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올 때만 해도 경제학, 경영학이 어떻게 다른지조차 잘 몰랐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경영학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한테는 경제학이 훨씬 더 재미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95년 초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대학원으로 진학했습니다. 공무원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저는 이제 15년 정도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동안 공무원은 어떤 직업인가 라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에게는 계속 물었습니다. 제 첫 번째 답은 “남의 돈으로 좋은 일을 하는 직업”입니다. 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좋은 일을 상당히 큰 규모로 하려면, 많은 돈과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독거노인을 위한 방안, 중소기업을 위한 방안, 환경 보호를 위한 방안들이 그렇습니다. 큰 부자라면 자기 돈을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돈만으로 되지도 않습니다. 특히 그 일에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경우에는 그걸 해결할 힘도 필요합니다. 또한 개인이 하는 일은 일회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

공무원이 되면 그런 일을 잘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려면 보건복지부나 중소기업청, 환경부에서 일하며 그런 방안을 알찬 계획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토의하고, 상사에게 보고하고, 결정권자를 설득해야 합니다. 기획재정부를 설득하여 국세청이 거둔 세금의 일부를 배정받아야 합니다. 안전행정부와 협의하여 전담할 부서를 새로 만들거나 인원을 더 배정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일회성으로 그칠 게 아니라 계속 그 일이 지속되려면, 법제처의 도움을 받아 법령에 반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얼마나 힘든 여건에서 돈과 사람을 모으는지, 그리고 나서도 제도적인 뒷받침을 못받아서 얼마나 힘겨운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남의 돈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계획이 좋으면 돈과 사람과 제도가 따라 붙는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멋진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물론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토의하고 설득하고 협의하는 각 단계마다 불확실성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좋은 계획이 뜻밖의 상황을 만나서 좌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알찬 계획이고,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면, 언젠가 적절한 기회를 만나서 실행에 옮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실업이나 인플레이션은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기업에게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에서는 해결해야 할 대표적인 경제 문제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경제학의 관점은 정부의 관점입니다. 또한 경제학을 통해 배우는 사회적 비용이나 외부효과, 공공재 등과 같은 많은 개념들은 그 어느 직업보다도 공무원에게 유용합니다.

(어느 가을 아침 출근길)

공무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답은 "부당한 요구를 당당히 거절해야 하는 직업"는 것입니다. 공무원은 어떤 직업보다도 그래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사회에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다가 직장을 잃을 수 있거나,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공무원은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거절하지 않고 소극적으로라도 동조하다가는 직장을 잃거나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인식이 이제는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뉴스를 보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듭니다. 공무원 중에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 그 요구에 쉽게 동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일 때문에 공직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부당한 요구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공직에 몸담고 있던 지난 15년 간만 돌이켜봐도 많이 개선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작년 7월부터 1년간 육아휴직을 했습니다. 서른 아홉에 결혼하고, 마흔 살과 마흔 두 살에 아이를 얻었습니다. 아내도 직장 생활을 하는데, 휴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육아휴직은 아직 흔하지 않아서, 저도 신청하기 전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다행히 조직 내에서 많은 분들이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좋게 생각하는 분위기라고들 합니다.

이처럼 공직사회는 계속 바뀌고 있습니다. 조금씩이나마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공직에 들어올 사람들이 지금까지 상상도 못한 멋진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먼저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소식지 제31호 (2014년 8월)에 실렸습니다. 블로그에 옮기면서 아주 약간 고쳤습니다.

댓글

  1. 그 '남의 돈'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잘 되면 좋겠지만,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치중하는 경우도 있고, 잘 안되도 그만인 경우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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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기업을 나오고 공무원을 준비하면서 첫번째 이유가 좋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 글 읽으면서 다시 초심을 떠올려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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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서 다시 만나니 새삼 반갑네요. 작년 말부터 여러 변화가 있었지요. 부서, 자택(!), 육아 등. 금년에 그 모든 일들이 다 잘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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