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와 현실이 어긋난 상황을 만나면

제가 2003년 군에서 인사행정 장교로 복무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 "맡은 일의 완벽성을 추구하면 관련된 사람을 미워하기 쉽고, 사람을 배려하고자 하면 그 일을 맡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더라."
     
  • "법/제도는 해야 할 일을 하고, 해서 안될 일을 안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만약 해야 할 일을 못하고, 해서 안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어떤 법/제도라고 느낀다면,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

※ 아래 글은 읽기에 지루하고, 별 내용도 없는데 너무 길게 썼나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쓴 목적은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저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임을 밝히며,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페이스북을 통해 아래 기사, 그리고 이에 대한 여러 의견을 읽다가, 2003년에 했던 위의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임정욱 센터장 페이스북 글, https://goo.gl/WGXLQt)

※ 저는 이를 '김미영 씨 사례'라고 부르겠습니다. 내용을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이 글의 맨 끝에 요약하여 정리해 두었습니다.


원래 법/제도는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강제력을 부여해서 지키게 하고, 이를 위반하면 처벌합니다. 하지만 법/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반영하려 하면 제도가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들이 이해하고 지키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한 것, 또는 하지 않아야 할 일인데도 했던 이유가 법/제도라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저는 이것을 "어긋난 상황"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어긋났다고 제가 생각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만, 줄여서 표현했습니다.

어긋난 상황을 바로 잡는 것은 보통 무척 힘듭니다. 이런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될 수 있고, 그런 이해관계자들이 많거나 그 이익이 클수록, 이를 바로 잡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클 것입니다. 사회 현상이 점점 복잡해질수록 협의하고 설득할 관련 부처나 단체가 많습니다. 중요한 사안이고 일단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면, 국회도 뜻을 같이 해서 움직여야만 바로 잡을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어긋난 상황 여부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입니다만, 일하면서 한번씩 이런 것을 느꼈던 공무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 해 공무원으로 생활하면서, 한번도 느끼지 못했다면 더 이상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사례에서 김미영 씨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 남들 모르게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 카페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른 환자 가족이 필요하다고 하면 대신 구매해서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법/제도 위반인지 김미영 씨가 미리 알았는지에 대해 저는 알지 못합니다.
  • 만약 위반임을 몰랐다면, 범의(犯意)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만약 위반임을 알았더라도 그렇게 했다면, 만약 그렇게 가정하면 김미영 씨가 보기에는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 법/제도"였을 것입니다. 
식약처는 김미영 씨를 조사했고, 법/제도를 위반했다고 보았고,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 누군가는 김미영 씨가 한 일이 법/제도를 위반했다고 식약처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그에 따라 식약처는 조사해야 했습니다. 
  • 김미영 씨가 명백히 법/제도를 위반했다면, 식약처가 고발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 식약처는 법/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면 개선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김미영 씨가 한 일에 대해 식약처의 담당자가 어떻게 느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 김미영 씨가 한 일이 법/제도 위반이므로, 애당초 하지 않았아야 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2003년에 했던 생각 중 "맡은 일의 완벽성을 추구하여, 예외를 요구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 아니면, 김미영 씨가 한 일에 공감하고 법/제도를 위반하더라도 아이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미영 씨를 처벌하라고 검찰에 고발했다면, 그렇게 가정하면, 그 담당자가 "하지 않아야 할 일인데도 했던 이유가 법/제도"였을 것입니다. 
  • 만약 검찰에 고발은 해야 했지만, 조속히 법/제도 개선을 하려고 의욕적으로 나섰다면 제가 2003년에 했던 생각 중 "사람을 배려하고자 하면 그 일을 맡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 경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사회 각계로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습니다.
  • 민원, 조사, 고발이 진행되면서, 김미영 씨가 고통을 받았고, 스타트업법률지원단 등이 무료 변론에 나섰습니다.
  • 비록 일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식약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법/제도가 개선하였고, 검찰은 김미영 씨에 대해 기소유예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법/제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고, 사회 환경이 변화하면서 한때는 최적이던 법/제도였더라도 "어긋난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긋난 상황"이라고 문제가 제기될 때 이를 어떻게 논의하고 처리하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번 김미영 씨 사례를 이렇게 거침으로써, 앞으로 이와 유사한 문제가 제기될 때, 우리나라 정부와 사회가 더욱 슬기롭게 풀어가기를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 길고 지루한 글인데, 읽어주신 분께 감사합니다.



※ 김미영 씨 사례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은 아래 내용을 안 읽으셔도 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혹시라도 잘 모르시는 분, 또는 일부만 아시는 분들을 위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소아당뇨병을 앓는 아들을 키웁니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의료기기를 개조해서 썼습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환자 가족들을 위해 체코에서 연속혈당측정기를 대신 구입해서 직접 개조해서 거의 실비를 받고 제공했다고 합니다.
     
  • 김미영 씨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다른 환자 가족들에게 널리 알렸기 때문에, 이 일은 몰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식약처에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이 일이 불법 의료기기 판매 행위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2017년 3월 식약처는 김미영씨를 불러 조사했고, 2017년 3월과 12월애 식약처는 관세법과 의료기기법 위반 혐의로 김씨를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식약처가 이렇게 고발한 것에 대해 스타트업법률지원단 등 김미영 씨를 돕는 분들이 나섰고, 식약처를 규탄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언론 기사와 페이스북 글을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분을 응원했습니다.
     
  • 김미영 씨가 대신 구입한 의료기기가 2년간 3억원을 넘는데, 차액은 9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어느 기사 https://goo.gl/ewuQ5n 에 따르면 그 90만원도 이윤이라기 보기 힘들고 환율 차이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 2018년 1월 30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소아당뇨 환우들의 수입 의료기기에 대한 의료기기법 완화를 요청합니다’가 게시되었고, 6만명이 넘게 참여했습니다.
     
  • 2018년 2월에 식약처는 '의료기기 허가·신고·심사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는 등 제도가 바뀌기 시작했고, 국내에 대체치료수단이 없는 의료기기에 한해서는 개인이 허가를 받고 수입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의료 정책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 2018년 6월에 검찰은 김미영씨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했습니다.

위에 언급된 청원, 그리고 제가 참고한 주요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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